디지털화된 21세기에서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우리 생활에서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흔한 예시를 들어볼까요.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찍은 뒤 혹은 지하철에서 웹서핑을 하면서 출근한 후, 어제 마무리 못한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 타닥타닥 타자를 치죠. 사내 메시지로 점심으로 뭐 먹겠냐고 묻는 동기에게 김치찌개라고 답장을 보냅니다. 오후에 각종 작업을 처리한 뒤 친구에게 퇴근하고 오늘 치맥 어떠냐고 카톡을 보냅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상생활 예시입니다.
여기서 한순간도 빠짐없이 공통적으로 사용된 것이 있죠. 바로 자판입니다. 의사를 전달할 때 혹은 정보를 검색할 때 우리는 타자를 칩니다. 지금 기자 본인이 기사를 작성하는 바로 이 순간에도 말이죠. 이 자판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 역사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오늘날 자판의 어머니, 공병우 타자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자판의 아버지, 공병우 타자기란?
위의 사진은 오늘날 자판의 아버지, 공병우 타자기의 모습입니다. 이 타자기를 만든 공병우 박사는 193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안과 전문병원을 개원한 의사였습니다. 광복 이후 한글의 기계화에 주력한 그는 1949년 최초의 한글 타자기를 그의 이름을 따 개발했습니다. 세벌식 타자기인 이 타자기는 타수를 기준으로 로마자 타자기 보다 30%나 빠르게 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한국인 최초, 미국 특허를 받다
공병우 타자기가 의미 있는 이유는 당시 한글의 기계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타자 속도를 획기적으로 빠르게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특허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인 최초로 미국 특허를 받아냈다는 것에 그 의미가 더해집니다. 1909년, 한국 특허 1호 말총모자 특허 이후 약 41년 만의 일이었는데요 1950년 그는 미국의 타자기 제조회사인 언더우드와 손잡고 한국인 최초로 미국 특허를 받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그의 타자기는 6.25 정전 협정문 한글본을 만드는 데에도 쓰일 정도로 한글 타자기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 바뀐 정책, 떨어진 가치. 하지만...
하지만 그 위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바로 정책이 바뀌어 표준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1969년 정부가 네벌식을 타자기의 국가 표준으로 정하고 1982년에는 컴퓨터마저 두벌식을 표준 자판으로 확정하면서 안타깝게 공병우 타자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한편에 이름을 새기게 되는데요 한글글꼴개발원이 2000년, 세벌식 한글 타자기 서체인 공한체를 ‘한글글꼴상’ 대상에 선정했습니다. 뒤이어 문화재청 또한 2013년, 공병우 타자기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면서 한글의 기계화에 기여한 이 발명품을 인정했습니다.
지금까지 자판의 아버지, 공병우 타자기를 알아봤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정책이 바뀌면서 자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것이 남긴 역사적인 위상과 가치는 지금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료인용 : 특허청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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